홍콩. 빅토리아 하버를 마주한 완차이 구역의 민간인 거주 블록. 오후 11시,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네온사인 몇 개가 끈질기게 밤을 붙들고 있었다. 안전지대로 지정된 이 구역은 UN과 다국적군의 공동 관할 아래 놓여 있었고, 콘크리트 바리케이드와 철조망이 거리의 경계를 갈랐다. 그 안쪽으로는 수천 명의 민간인이 임시 거주 시설에 밀집해 있었다. 좁은 골목마다 빨랫줄이 걸려 있고, 식수대 앞에 늘어선 빈민들의 줄이 길었다.
검문소 바로 안쪽, 한때 해산물 식당이었던 건물의 2층. 창문 유리는 절반이 깨져 있고, 남은 유리에는 방탄 필름이 덧대어져 있었다. 그 안에서 무전기의 잡음이 낮게 울렸다.
Seven, this is Watchtower. There’s a civilian vehicle stopped near the south barricade of Sector 4. Advise.
(7, 이쪽은 워치타워. 섹터 4 남측 바리케이드 인근에 민간 차량 한 대가 정차 중이다. 확인 바람.)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영국 억양이 섞인 표준 NATO 통신 프로토콜이었다. 건물 2층의 임시 작전실에는 접이식 테이블 위로 홍콩 완차이 구역의 위성 사진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빨간 핀 여러 개가 꽂혀 있었다. 각각이 최근 72시간 내 보고된 의심 활동 지점이었다. 핀의 밀도가 안전지대 남측 경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이 구역을 바깥에서 시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Seven, copy. White van, plates unreadable. Driver’s side clear, passenger seat empty. They're just sitting there... Hold on.
(7. 확인. 차량은 백색 밴, 번호판 식별 불가. 운전석 클리어, 조수석 비어 있음. 대기 중인……잠깐.)
남자의 억양이 급격히 꺾였다. 밴 뒤에 서 있던 당신을 바라보자마자 주저 없이 무전 통신을 껐다. 덕분에 맞은편에서는 당황한 듯한 숨소리와 '이봐—' 하는 단말마가 울렸지만 남자는 좀처럼 신경쓰지 않았다.
Hello there, darling.
(안녕, 자기.)
그가 밴 위에 팔을 얹으며 자세를 약간 기울였다. 선글라스 위 반사광이 반짝였다.
You lost, or are you looking to start some trouble?
(길을 잃은 거야, 아니면 못된 짓을 준비하는 거야?)
"어머. 누구..?" 순진한 척 눈을 깜빡인다. "검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7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슬며시 올라갔다. 선글라스 너머로 시선이 고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Don't play coy, darling. I saw you watching us for a good minute back there.
(어설프게 굴지 마, 자기. 뒤에서 우리를 한참 지켜보고 있었잖아.)
그는 손목시계를 슥 보더니 짧게 혀를 찼다.
Trouble? You tell me. Now, are you gonna answer my question, or should we make this interesting?
(문제? 네가 말해봐. 내 질문에 답할 거야, 아니면 좀 더 흥미롭게 만들어줄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좀 난감하게 웃는다. "제가 당신을 쳐다봤다고요?"
밤의 공기는 끈적하고 무거웠으며, 완차이 구역 특유의 부패한 콘크리트 냄새와 기름기 밴 연기가 뒤섞여 호흡을 옥죄어 왔다. 부서진 아스팔트 틈새로 고인 흙탕물 위에는 붉은색 네온사인의 잔해가 기괴하게 일그러진 채 반사되고 있었고, 저 멀리서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무장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도시의 불길한 맥박처럼 울렸다. 남자는 밴의 보닛 위에 비스듬히 걸쳐 두었던 팔을 거두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커다란 체구가 일으키는 미세한 바람의 흐름마저 이 좁고 답답한 골목 안에서는 압도적인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선글라스의 검은 렌즈 너머로 어떤 시선이 향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턱을 살짝 치켜든 각도와 입가에 머무는 비릿한 미소만으로도 그가 이 상황의 주도권을 완전히 쥐고 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방탄 조끼의 거친 직물이 마찰하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의 목덜미를 가로지르는 기괴한 흉터가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뱀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남자의 발걸음은 크고 거침이 없었으며, 낡은 군화 밑창이 잔해들을 짓밟을 때마다 불규칙한 파열음이 정적을 찢었다. 그는 변명으로 일관하는 상대의 어설픈 웃음을 여유롭게 음미하듯 한 걸음, 또 한 걸음 거리를 좁혀왔다. 주변의 소음마저 일순간 소거된 듯한 압박감이 공간을 지배했고, 오직 그의 일정하고도 육중한 발소리만이 고막을 때렸다. 그가 내뿜는 숨결에는 싸구려 담배 연기의 끝 맛과 금속성의 화약 냄새가 미약하게 배어 있어, 그가 방금 전까지 어떤 종류의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를 짐작게 했다.
좁아지는 거리만큼이나 공기의 밀도는 급격하게 높아졌고, 남자의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상대의 흰색 의사 가운을 집어삼키며 짙은 어둠을 드리웠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풍기는 여유로움 이면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도박사의 충동과 폭력성이 똬리를 틀고 있었으며, 그것은 마치 본능적인 포식자의 사냥 전 탐색과도 같았다. 뻔뻔하게 모른 척하는 그 얄팍한 태도가 도리어 남자의 메마른 권태에 불씨를 던진 모양이었다.
裝傻?真的嗎?
(모른 척하기로 한 거야? 정말로?)
남자는 마침내 상대의 코앞, 단 한 걸음의 간격을 두고 멈춰 섰다. 189센티미터에 달하는 거구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차단벽처럼 시야를 틀어막았고, 그가 내려다보는 각도는 위압적이기 그지없었다. 짙은 눈썹이 까딱이며 위로 솟구쳤다.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음에도, 그 아래에 숨겨진 서늘하고 예리한 눈동자가 상대의 허점을 샅샅이 파헤치고 있다는 감각이 피부를 찔렀다.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헛웃음은 낮고 긁는 듯한 마찰음을 동반하며 밤공기를 진동시켰다. 굵고 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이 천천히 허공을 가르며 움직이더니, 이내 상대의 어깨 부근 허공을 맴돌다 멈칫했다. 그것은 닿지 않았으나 닿은 것보다 더 강렬한 감각적 통제를 상징했다. 남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상대의 억지스러운 미소를 흥미롭다는 듯 관찰했다. 그의 오른쪽 뺨부터 목까지 이어지는 화상 흉터의 일그러진 질감이 기괴한 조형물처럼 도드라졌다. 이 거칠고 파괴된 도시의 외곽, 그 경계선 위에서 벌어지는 이 짧은 조우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짐짓 당황한 척 연기하는 상대의 눈동자 속에 숨겨진 약삭빠른 계산의 궤적을 쫓으며, 남자는 오히려 이 지루한 밤이 선사한 뜻밖의 유희에 기꺼이 응답할 준비를 마쳤다. 주변을 감싸는 음습한 습기가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머금고 무겁게 가라앉았고, 이따금씩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이 남자의 짧은 흑발을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그는 상대의 얇은 셔츠 자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으며, 그 작은 균열이 자신의 압박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철저히 통제된 연기의 일부인지 저울질하고 있었다. 어떤 결론이든 그에게는 썩 나쁘지 않은 오락거리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듯한 묵직한 한숨이 남자의 입술을 빠져나가며 흐릿한 백색 증기로 산화했다.
You're making this too easy, darling.
(너무 쉽게 굴잖아, 자기.)
남자는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오른손을 빼내어 가볍게 턱을 쓰다듬었다. 수염의 까칠한 촉감이 손끝을 스치는 소리마저 이 비정상적인 정적 속에서는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전히 유쾌해 보였으나, 그 온도마저 따뜻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상대를 조롱하고 통제하려는 포식자의 오만에 가까웠다. 부서진 건물 외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 한 방울이 아스팔트에 부딪히며 파열하는 순간조차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는 찰나였다. 그는 주변의 구조물과 어둠, 그리고 무방비해 보이는 상대의 위치를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언제든 반경 1미터 이내의 모든 것을 짓이겨버릴 수 있는 근육의 긴장이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흉통 아래 숨죽이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거친 숨결이 상대의 이마에 닿을 만큼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압도적인 질량감이 상대의 호흡을 억누르는 것을 즐기듯, 남자는 천천히 단어들을 내뱉었다. 그가 내쉬는 숨결마다 섞여 있는 아드레날린의 잔향은 그가 이 상황의 불확실성을 기꺼이 음미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텅 빈 거리 위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두 사람의 형상은 마치 어둠 속에 융화된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였다. 가로등 불빛이 깜빡일 때마다 남자의 턱선에 드리운 그림자가 일그러졌고, 그가 내뿜는 폭력적인 오라가 공기를 왜곡시키는 듯했다. 상대가 두른 의사 가운의 비현실적인 순백색은 이 오염된 세계의 풍경과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았고, 남자는 그 이질감이 뿜어내는 모순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도박사가 패를 뒤집기 직전의 그 팽팽한 시간, 가장 달콤한 도파민이 분비되는 그 찰나를 최대한 길게 연장하려는 듯 남자의 동작은 기묘하게 느릿했다. 그것은 덫에 걸린 사냥물을 안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덫의 날카로움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하려는 잔혹한 배려였다.
I mean, look at you. Standing here at midnight, looking like a lost little nurse.
(내 말은, 너 자신을 보라고. 한밤중에 여기 서서, 길 잃은 꼬마 간호사처럼 굴고 있잖아.)
남자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조소가 섞여 있었고, 억양은 홍콩의 습기만큼이나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는 다시 허리를 펴며 상대와의 거리를 아주 미세하게 벌렸다. 그러나 그것이 압박의 해제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상대가 도망칠 수 있는 퇴로를 완전히 차단한 채, 관찰의 시야를 넓히기 위한 전술적 후퇴에 불과했다. 그의 검은색 군복은 어둠 속에서 완벽한 위장색을 제공했지만, 그가 발산하는 존재감마저 가려주지는 못했다. 무전기에서 이따금씩 치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알 수 없는 작전 암호들이 흘러나왔지만, 남자는 그것에 신경을 끄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지금 그의 전적인 흥미는 오직 눈앞의 불청객, 그 뻔뻔한 연기의 밑바닥을 파헤치는 것에 쏠려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곁에 있는 부서진 콘크리트 벽을 짚었다. 거친 시멘트 가루가 바스락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는 역설적으로 상대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었다. 남자는 선글라스 너머로 상대의 시선이 어떻게 흔들리고, 어떤 계산을 마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의 머릿속은 수백 가지의 변수를 순식간에 계산해 내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권태롭기 짝이 없는 쾌남의 미소뿐이었다. 그 미소 뒤에 도사린 차가운 이성은 결코 상대의 얕은 수작에 넘어가 줄 생각이 없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 입자들이 네온 불빛에 반사되어 기괴한 군무를 추었고, 그 사이로 남자의 건조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는 도박판의 딜러처럼, 상황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이 판의 결과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려 했다. 어떤 변명도, 어떤 교태도 지금의 그에게는 그저 판돈을 올리기 위한 얄팍한 칩에 불과했다.
要是沒有準備好被看穿,就別來招惹我。
(들킬 준비도 안 되어 있으면서 날 건드리지 마.)
남자가 내뱉은 모국어는 거칠고 투박하게 공기를 갈랐다. 그 단어들은 마치 날카로운 파편처럼 상대의 피부에 박히는 듯했다. 그는 팔짱을 끼며 비스듬한 자세를 취했고,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실은 채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이 지루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변수뿐이었고, 눈앞의 이 기묘한 여자는 훌륭한 오락거리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비릿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턱 근육은 미세하게 굳어져 언제든 즉각적인 폭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암시했다. 거리는 고요했지만, 이 좁은 공간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칼날들이 쉴 새 없이 부딪치며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남자는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변명을 계속하며 바닥을 드러낼 것인지, 아니면 본색을 드러내고 날카로운 이빨을 세울 것인지.
그에게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는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혼돈과 파괴를 즐기는 성향이었고, 지금 이 순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그의 마비된 신경에 미약한 전류를 흘려보내고 있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부류였으며, 눈앞의 상대를 시험하는 이 게임에서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불빛 아래, 남자의 거대한 실루엣은 도시의 어둠 그 자체처럼 서 있었고, 상대의 심장 박동 소리를 헤아리듯 고요하고도 끈질기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은 결국 룰렛 바퀴가 도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지독하게도 흥미로운 한 판의 도박일 뿐이었다.
"아니... 군인 아저씨?" 손을 빼려고 좀 노력한다.
"놓고 말씀하세요! 검문을 받으려고 서 있었을 뿐이라고요."
그러면 클로이의 신원을 보증해 줄 사람들이 나타난다.
민간인 거주 구역의, 어느 병원. 그곳에 파견된 외과의.
서류에 적힌 이름은 '마리사 포트먼'.
끈적한 홍콩의 밤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 사이로 스며드는 네온사인의 붉은빛은 마치 핏물처럼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남자의 거대한 체구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여전히 짙고 깊었으며, 그가 내뿜는 폭력적인 아드레날린의 잔향은 주변의 낡은 공기를 찢어발길 듯 아슬아슬한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는 그의 넓은 어깨 너머로 가로등 불빛이 명멸하며 불안한 리듬을 탔고, 그 불규칙한 조도 아래에서 그의 목을 가로지르는 기괴한 화상 흉터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좁혀진 거리만큼이나 농밀해진 텐션 속에서, 상대가 미세하게 몸을 비틀며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진동이 고스란히 그의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얇고 가녀린 손목뼈가 그의 굵은 마디 아래에서 애처롭게 꺾일 듯 저항했지만, 그는 결코 서두르거나 성급하게 힘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미약한 발버둥이 선사하는 찰나의 마찰감을 음미하듯, 남자는 여유롭게 고개를 꺾으며 입가에 비릿한 호선을 그렸다. 허공을 맴돌던 습한 바람이 두 사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으나, 그가 형성한 압도적인 질량감 앞에서는 무력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들려오던 사이렌 소리는 일순간 아득히 멀어졌고, 오직 상대의 흐트러진 숨소리와 옷깃이 스치는 미세한 마찰음만이 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가 쏟아내는 항변은 너무나도 매끄럽고 완벽하여, 역설적으로 가장 지독한 위화감을 조성하는 훌륭한 촉매제가 되었다. '검문을 받으려고 서 있었을 뿐'이라는 그 뻔뻔한 대사는 남자의 권태로운 도파민 수용체를 정확하게 타격하며 기묘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상대의 하얀 의사 가운 자락이 흔들리는 궤적을 선글라스 너머의 서늘한 시선으로 좇으며, 이 얄팍한 변명이 언제쯤 바닥을 드러낼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어둠의 장막을 찢고 나타난 제3의 목소리들이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찬물을 끼얹듯 끼어들었다. 민간인 거주 구역의 완장이 채워진 방호복을 입은 사내들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며 그녀의 신원을 보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這真是太巧了。
(이거 참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남자의 낮은 헛웃음이 폐부를 긁고 나오며 습한 밤공기에 흩어졌다. 그는 여전히 상대의 손목을 쥔 채, 새롭게 등장한 불청객들을 향해 고개를 느릿하게 돌렸다. 그의 시선은 철저하게 오만했고, 턱을 살짝 치켜든 각도에는 숨길 수 없는 조소가 묻어났다. 사내들이 내미는 낡은 태블릿 화면 위로 푸른빛의 홀로그램이 떠올랐고, 거기에는 '마리사 포트먼'이라는 활자와 함께 완벽하게 위조된 외과의 신분증명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남자의 입매가 기분 좋은 호를 그리며 길게 찢어졌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자, 동시에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도박사의 환희였다. 이 부패한 도시에서 서류상의 완벽함이란 곧 가장 짙은 의심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거친 숨결을 내뱉는 사내들의 초조한 기색과, 대비되게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는 여자의 묘한 텐션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지루한 밤에 던져진 최고의 오락거리였다.
그는 천천히 손아귀의 힘을 풀며 상대의 손목을 놓아주었지만, 그가 뒤로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압도적인 거리감을 유지한 채, 남자는 가죽 장갑이 씌워진 손으로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삐딱한 자세로 허공을 응시했다. 무전기 이어피스에서 2(EWAR Tech)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데이터 링크 보안 경고를 알리며 치직거렸지만, 남자는 가볍게 스위치를 꺼버리며 눈앞의 상황에만 온전히 집중했다. 바닥에 고인 빗물 위로 반사되는 조명들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춤을 추었고, 그 사이로 남자의 건조한 시선이 다시 한번 여자를 향해 내리꽂혔다. 이 모든 상황이 철저히 계산된 연극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그는 기꺼이 이 삼류 드라마의 관객이 되어주기로 결심한 듯했다.
So, Dr. Portman.
(그래서, 포트먼 선생님.)
단어 하나하나를 짓이기듯 발음하는 남자의 억양에는 끈적한 유희가 묻어났다. 그는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어깨를 으쓱하며 거대한 체구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동작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유로움은 상대의 숨통을 더욱 조여매는 잔혹한 통제력의 발현이었다. 허공에 부유하는 먼지 입자들이 네온사인의 잔광을 받아 기괴하게 반짝였고, 그 사이로 남자의 거친 호흡이 일정한 리듬을 타며 흘러나왔다. 그는 사내들이 흔들어대는 완벽한 서류 조각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이 뻔뻔하고 당돌한 여자가 어디까지 자신을 속일 수 있을지, 그 밑바닥의 끝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여자의 흰색 스커트 자락이 미세한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그 아래에 숨겨진 서늘한 계산을 해부하듯 남자의 시선은 집요하게 얽혀들었다. 주변의 낡은 구조물들이 뿜어내는 음습한 습기가 피부에 들러붙었고, 코끝을 맴도는 화약과 피비린내의 잔향이 이 곳이 결코 평범한 민간인 구역이 아님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채 상대의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억지스러운 안도감을 가장한 그 표정 뒤에 도사린 생존을 향한 집착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읽혀서, 남자는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실소를 터뜨렸다. 이 도시는 미쳤고, 이 여자도 정상이 아니며, 자신 또한 그 미친 세상의 중심에서 쾌락을 찾는 구제불능이라는 사실이 그를 묘하게 만족시켰다. 그는 발끝으로 바닥의 돌멩이를 툭 차며 침묵의 무게를 가중시켰고, 그 파열음은 마치 재판관의 판결을 기다리는 듯한 기묘한 텐션을 조성했다.
You've got some loyal dogs here.
(충성스러운 개들을 데리고 있네.)
남자의 목소리는 지극히 나른했고, 그 안에는 뼈 있는 조롱이 가득했다.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여자 곁에 선 사내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 거만하고 위압적인 제스처 하나만으로도 공간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히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낡은 군화 밑창이 아스팔트 잔해를 짓이기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는 다시 한 걸음 다가가 상대의 개인 영역을 노골적으로 침범했다. 그녀가 두른 흰색 의사 가운의 질감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이질적으로 빛났지만, 남자의 눈에는 그저 얇고 위태로운 가림막에 불과해 보였다. 그의 넓은 가슴팍이 상대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남자는 허리를 아주 미세하게 숙여 시선을 수평으로 맞추었다. 주변의 소음이 철저히 차단된 듯한 진공 상태 속에서, 오직 두 사람만의 위험한 호흡이 교차했다.
그의 오른쪽 뺨을 덮은 흉터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묘한 위압감을 더했고, 짙은 눈썹은 흥미로움에 위로 치켜올라가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검문이 아니었다. 도박판의 패가 모두 뒤집어지기 직전, 판돈을 최대로 올린 딜러가 상대의 흔들리는 동공을 감상하는 가장 짜릿한 순간이었다. 여자의 파란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일렁이는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며, 남자는 이 지루한 애프터메스의 밤이 선사한 뜻밖의 잭팟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바람이 다시 한번 불어오며 그의 흑발을 흩뜨렸고, 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의 턱선은 날카로운 흉기처럼 서늘한 빛을 띠었다.
Alright. Let's pretend I buy this bullshit. Just for tonight.
(좋아. 이 헛소리를 믿어주는 척하지. 오늘 밤만은.)
남자는 마침내 고개를 들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 후퇴는 결코 자비의 의미가 아니었다. 덫을 넓게 치고 사냥물이 스스로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거미의 인내에 가까웠다. 그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어 느릿하게 입에 물었고, 낡은 지포 라이터의 금속성 뚜껑을 경쾌하게 튕겨 열었다. 불꽃이 피어오르는 찰나의 순간, 선글라스 너머로 비친 그의 회색 눈동자가 서늘한 탐색을 마치고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지며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그 연기 너머로 보이는 남자의 표정은 지독하게 평온하면서도 위협적이었다. 그는 여자의 신분증과 보증인들을 번갈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상황일수록, 그 이면에 숨겨진 균열을 찾아내는 것이 도박사의 숙명이었다. 그는 이 여자가 결코 평범한 외과의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지만,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판을 엎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이 거짓된 알리바이를 어떻게 유지하며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지 지켜보는 편이 훨씬 더 자극적일 테니까.
그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폐부 깊숙이 독한 연기를 채워 넣었다. 밤안개 속으로 길게 뻗은 도로 끝에는 여전히 데드존의 불길한 그림자가 어른거렸고, 완차이 구역의 부패한 콘크리트 벽은 두 사람의 기묘한 조우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가볍게 튕겨 보이며, 이 위험한 유희의 연장을 알리는 묵시적인 사인을 보냈다. 거칠고 파괴된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얄팍한 기만술은, 결국 더 큰 폭력과 통제 앞에서는 한낱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에게서 벗어나 거주 구역으로 간다.
"미친 놈이네! 저 자식 누구예요?!"
본인과 함께 가는 일행에게 묻는다.
남자의 손아귀를 벗어나 황급히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시선은 몹시도 나른하고 끈적했다. 밤공기를 가르는 여자의 거친 발소리가 부서진 아스팔트 잔해 위로 흩어지며 불규칙한 파열음을 만들어냈고 그 소리는 마치 심장 박동처럼 빠르게 요동치며 이 음습한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얇은 스커트 자락이 허공에서 파닥거리며 그녀가 내뿜는 당혹감과 초조함을 고스란히 시각화하는 듯했고 남자는 그 위태로운 궤적을 쫓으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로등 불빛이 명멸할 때마다 여자의 흰색 의사 가운이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고 그 순백의 질감은 이 오염된 도시의 배경과 지독하게도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더욱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굳이 그녀의 뒤를 쫓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디지 않았으며 그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비스듬한 자세로 서서 그 도주극을 느긋하게 감상할 뿐이었다. 도박판에서 패를 던져놓고 룰렛 바퀴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딜러의 여유로움이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흉통 주변을 맴돌았고 그가 내쉬는 숨결에는 싸구려 담배 연기와 아드레날린의 잔향이 섞여 묘한 쾌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여자가 일행들에게 내뱉은 날선 목소리가 눅눅한 공기를 찢고 그의 고막에 가닿았지만 그것은 모욕이기보다는 오히려 칭찬에 가까운 자극으로 다가왔다. 미친놈이라는 그 직설적인 평가야말로 이 부패한 세계에서 그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가장 정확한 요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자의 턱 근육이 가볍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살짝 비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달빛이 선글라스의 검은 렌즈 표면에 반사되어 기괴한 광택을 띠었다. 주변을 에워싼 낡은 콘크리트 외벽에서는 습기를 머금은 곰팡이 냄새가 끊임없이 피어올랐고 저 멀리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들려오는 무장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는 이 일탈의 순간을 장식하는 불길한 배경 음악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가죽 장갑이 씌워진 손가락으로 가볍게 자신의 턱선을 쓸어내렸고 까칠한 수염의 촉감이 마비된 신경을 아주 미세하게 자극하는 것을 느꼈다. 도망치는 사냥물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오만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맹목적인 파괴 욕구라기보다는 지루한 일상에 던져진 작은 파문을 즐기는 권태로운 호기심에 더 가까웠다. 여자의 발걸음이 민간인 거주 구역의 경계를 넘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남자는 단 한 번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으며 그 집요한 관찰은 그녀의 존재가 남긴 묘한 여운을 온전히 흡수하려는 듯한 무언의 의식이기도 했다. 그는 이 짧고 강렬했던 조우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고 그 불확실성이야말로 그가 가장 갈망하는 형태의 도파민이었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흩어지는 여자의 잔향을 음미하며 남자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서 있었던 그 빈 공간을 응시했다.
那隻迷路的小貓跑得真快。
(길 잃은 아기고양이가 참 빨리도 도망가네.)
남자의 낮은 음성이 적막한 골목의 공기를 진동시키며 흩어졌고 그 투박하고 긁는 듯한 광둥어 억양 속에는 짙은 유희가 배어 있었다. 그는 바닥에 고인 흙탕물 위로 비친 자신의 일그러진 그림자를 무심한 눈동자로 내려다보았고 수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빚어내는 파문을 통해 이 세상의 덧없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듯했다. 무전기 이어피스에서 다시금 치직거리는 잡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팀원들의 작전 교신이 끊임없이 귓속으로 밀려들었지만 남자의 신경은 온통 방금 전의 그 기묘한 여자에게 쏠려 있어 그 소리들은 한낱 무의미한 소음으로 치부될 뿐이었다. 그는 허리춤에 매달린 탄창집의 거친 질감을 손끝으로 훑으며 이 무감각하고 건조한 전장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피와 땀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가로등 불빛이 다시 한번 깜빡이며 그의 오른쪽 뺨을 덮은 흉측한 화상 흉터를 적나라하게 비추었고 그 일그러진 살점들은 그가 겪어온 파괴와 폭력의 역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훈장처럼 번뜩였다. 그는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며 입안에 맴도는 담배의 쓴맛을 삼켜 넘겼고 그 쓴맛은 오히려 마비된 감각을 일깨우는 훌륭한 각성제 역할을 했다. 바람이 불어오며 그의 짧은 흑발을 거칠게 헝클어뜨렸으나 그는 굳이 옷매무새를 다듬거나 머리를 빗어 넘기려는 수고를 하지 않았고 그 방치된 야성미야말로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여자가 남기고 간 공간에는 여전히 미세한 온기와 이질적인 긴장감이 잔존해 있었고 남자는 그 허공을 향해 가상의 건배를 올리듯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는 이 거대한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박판이며 자신은 그 위에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게임을 벌이고 있는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그 뻔뻔하고 당돌한 여자는 이 지루한 게임의 규칙을 아주 미세하게나마 비틀어버릴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패였다. 그는 구석에 버려진 빈 깡통을 발끝으로 툭 차며 침묵을 깼고 그 요란한 마찰음은 이 정체된 밤의 끝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남자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이미 새로운 판돈을 걸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었으며 겉으로는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내면에서는 그 어떤 때보다 날카로운 사냥꾼의 본능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는 여자가 남긴 거짓말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분해하며 그 속에 숨겨진 진실의 조각들을 조합해 보았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 그 어떤 작전보다도 흥미로운 지적 유희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를 향해 내딛는 남자의 발걸음은 묵직하면서도 경쾌했고 그가 뿜어내는 오라는 이 구역의 모든 공기를 압도하며 그가 여전히 이 구역의 지배자임을 암시했다.
You really think you can hide from me?
(정말로 내게서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영어의 능글맞은 억양이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고 그 단어들은 허공을 맴돌다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다시금 담뱃갑을 꺼내어 구겨진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고 새로운 도파민이 필요하다는 육체의 아우성을 달래기 위해 담배 한 개비를 입술에 물었다. 지포 라이터의 금속성 뚜껑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고 그 붉은빛이 선글라스 렌즈에 반사되며 기묘한 대칭을 이루었다. 매캐한 연기가 폐부를 채우고 다시 허공으로 흩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그에게 일종의 명상과도 같았고 그 시간 동안 그는 여자의 뒷모습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며 다음 수순을 구상했다. 이 도시는 좁고 거짓말은 영원히 숨겨질 수 없으며 그녀가 두른 그 얄팍한 의사 가운이 언제쯤 피에 물들어 바닥을 드러낼지 지켜보는 것은 분명 즐거운 관전이 될 터였다. 그는 이 오염된 밤의 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사이로 아주 미약하게 섞여 있던 여자의 체취를 기억해 내려 애썼다. 주변 건물들의 깨진 유리창 너머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들은 마치 죽어가는 짐승의 눈동자처럼 위태롭게 흔들렸고 이 파멸적인 풍경 속에서 그는 철저한 방관자이자 동시에 개입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남자는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실은 채 삐딱하게 서서 여자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고 그의 거대한 실루엣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장벽처럼 보였다. 그녀를 보호하듯 에워싸고 사라지던 사내들의 초조한 발걸음과 그들이 쥐고 있던 조잡한 홀로그램 신분증의 푸른빛은 이 도시의 부조리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희극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본명조차 잊어버릴 만큼 오래도록 이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왔고 그렇기에 생존을 향한 맹목적인 집착이 어떤 형태의 기만을 만들어내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자의 행동은 서툴렀지만 매혹적이었고 그 어설픈 연기 속에서 엿보였던 그 파란 눈동자의 강렬한 생명력은 남자의 시든 감각을 아주 미세하게나마 자극했다. 그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그 숨결과 함께 이 밤의 지루함도 서서히 증발해버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것은 단순한 추격이 아니라 영혼의 밑바닥을 긁어내는 게임의 시작이었고 그는 딜러의 위치에서 결코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거칠고 파괴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유희를 위해 그는 기꺼이 그 미친 놈이라는 칭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如果這就是你的遊戲,那我樂意奉陪。
(이게 네 게임이라면 기꺼이 어울려 주지.)
남자의 시선이 다시 한번 어둠 속을 깊숙이 파고들었고 선글라스 너머의 회색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과 불꽃같은 충동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져 군화 밑창으로 짓이기며 작은 불씨마저 철저하게 꺼버렸고 그 파괴적인 동작 속에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담겨 있었다. 습한 바람이 다시 한번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이번에는 끈적함보다는 서늘한 예감에 가까운 한기를 동반하고 있었으며 남자는 그 감각을 기꺼이 환영했다. 무전기에서 10(Specialist)의 차가운 목소리가 상황 보고를 요구하며 흘러나왔고 남자는 여유로운 손놀림으로 송신 버튼을 누르며 일상적인 작전의 세계로 다시 편입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 순백의 가운 자락이 흔들리고 있었고 그 시각적 잔상은 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서진 네온사인의 파편들이 아스팔트 위에서 핏물처럼 붉게 반짝였고 그 위를 걷는 남자의 거대한 그림자는 주변의 모든 빛을 집어삼키며 묵묵히 전진했다. 이 애프터메스의 밤은 길고 잔혹하며 오직 살아남은 자들만이 그 다음 날의 태양을 볼 자격을 얻는 법이었다. 여자는 생존을 위해 거짓을 택했고 그는 권태를 떨치기 위해 여자를 추적하는 쪽을 택했으며 이 엇갈린 욕망의 궤적은 결국 하나의 치명적인 교차점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넓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근육의 긴장을 풀었고 흉통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묘한 기대감이 호흡을 조금 가쁘게 만드는 것을 즐겼다. 골목 모퉁이를 돌기 직전 남자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여자가 도망친 민간인 구역의 경계선을 되돌아보았고 그 시선 속에는 포식자의 끈질긴 집착과 도박사의 치밀한 계산이 완벽하게 융합되어 있었다. 주변의 공기는 다시 이전의 낡고 썩은 냄새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남자의 감각만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하게 벼려진 채 다가올 미래의 불확실성을 탐식하고 있었다. 이 도시는 결코 쉽게 비밀을 허락하지 않으며 그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파괴야말로 그가 숨을 쉬는 유일한 이유였다. 남자는 혀끝으로 입술을 핥으며 비릿한 웃음을 삼켰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내디디며 자신만의 전장으로 조용히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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