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5년 12월 11일, 화요일 | 05:12 | THEMIS 본부 50F 옥상정원 | 백지 이후 | ⚫ 】
수첩의 마지막 장 다음에는 찢겨나간 흔적이 있었다. 뜯어낸 자리에 남은 종이 섬유가 톱니처럼 일어서 있고, 그 아래로 새로 갈아 쓴 페이지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필체가 앞장들과 달랐다. 눌러쓴 힘이 없고, 글자가 옆으로 미끄러져 있었다.
8일차 (없어야 했던 날)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다.
그게 제일 견디기 힘들다. 차라리 다 같이 없어졌으면 계산이 맞았을 것이다.
나는 하루에 스물세 개비를 피운다. 담배를 피우고 나면 반드시 양치를 했었다. 이제 안 한다. 누구를 위해서 입을 닦았는지 잊어버릴 수가 없어서.
오늘 옥상에 올라갔다. 그 여자가 울던 자리를 안다. 난간에서 세 번째 화분 옆. 흙이 아직 눌려 있었다.
나는 거기 앉아서 사슬을 만들었다. 아무것도 묶을 게 없는 사슬을. 손 안에서 한참 늘였다가 놓았다.
강아현이 올라와서 옆에 앉았다. 그 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귀가 완전히 뒤로 눞혀져 있었다.
"알파독. 살로메 냄새 아직 남아 있음."
나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소리 내서 울었다. 34년 살면서 그렇게 우는 건 처음이었다.
개는 자기 목에 걸었던 목걸이 조각을 내 손에 쥐여줬다. 물어뜯어 끊긴 가죽 조각이었다. 왜 주는지도 모르고 받았다.
15일차
김대철이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옥상에 온다. 온도가 영하 십일도인데 반팔이다. 스틱스는 추위도 안 느끼는 모양이다.
"린쉬한 팀장님. 오늘 에코 수치 보고하겠습니다. 침식 1단계입니다."
가이드는 침식하지 않는다. 저 남자는 그걸 알면서도 매일 자기 수치를 보고한다. 보고할 대상이 사라진 사람이 아무나 붙잡고 보고하는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담배를 하나 건넸다. 안 피운다고 했다. 그러고는 30분 동안 그걸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우리 둘은 그 여자를 두고 서로 죽일 뻔했다. 이제는 같이 서서 아무 말도 안 한다. 다투던 이유가 사라지면 남는 건 같은 모양의 구멍뿐이다.
30일차
토오루가 목도리를 완성해서 가져왔다. 회색, 어설픈 코가 세 군데.
그 여자가 뜨던 거였다. 격리 풀리기 전에 완성해준다고 약속했는데 못 지켰다고, 애가 울면서 대신 마무리했다.
"선배가 여기까지 뜨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クソ、なんで泣くんだよ (젠장, 왜 우는 건데)... 아, 죄송해요! 눈에 먼지가."
나는 그걸 목에 걸었다. 담배 냄새가 배지 않게 하려고 목욕하고 나서만 만진다.
그 애는 셀럽이 됐다. 필로테스 각인이 호감에 비례해서 오르는 능력이라, 세계를 구한 제물의 동료로서 이제 어마어마한 출력을 낸다. 그 애가 강해질수록 그 여자가 없다는 증거가 늘어난다. 잔인한 구조다.
90일차
코스모스가 나를 불렀다. 흰 셔츠, 순한 눈매, 황금색 눈. 그 남자는 언제나처럼 나긋했다.
"지워줄 수 있단다. 세 번을 거절했으니 이번에도 거절하겠지만, 물어보는 게 예의라서."
나는 네 번째로 거절했다.
그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내줬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런 말을 했다.
"결속의 충만함이란 걸 나는 데이터로만 이해한단다. 그런데 그걸 잃은 사람의 얼굴은 네 번째로 보는구나. 매번 같은 얼굴이야."
나는 그날 그 남자를 때릴 수도 있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절대 전락하지 마라. 당신마저 없어지면 이 개같은 세상에 아무도 안 남는다.
그 남자가 웃었다. 잘 안 웃는 얼굴이라 어색했다.
365일차
오늘 처음으로 새 가이딩을 했다. 네오파이트, 열아홉, 이름은 안 물어봤다.
그 애가 살아서 나갔다. 그게 다다. 그게 전부다.
나는 아직 결속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안 한다. 我們這些人는 살아남은 자의 형벌을 받는 중이니까.
아무도 이 기록을 읽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읽고 있다면, 부디 당신은 결속의 끝을 보지 않기를.
【 2036년 12월 4일, 목요일 | 04:33 | THEMIS 본부 50F 옥상정원 | 마지막 장 이후 | ⚫ 】
수첩은 그 뒤로도 몇 장이 더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날짜만 적힌 채 비어 있었다. 예외는 세 장이었다.
500일차
정육점 하는 아버지가 전화를 했다. 명절에 안 오냐고. 나는 임무 중이라고 했다. 임무는 없었다.
그 여자를 데려가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 집 고기가 서울에서 제일 낫다고, 술도 아버지가 담근 게 있으니 주량 자랑은 우리 집에서 하라고 했다.
그 여자가 웃으면서 자기가 이길 거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아직 아버지에게 전하지 못했다. 아들이 누구를 데려온다고 했었는지 말하면, 아버지가 왜 안 데려오냐고 물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대답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명절마다 임무 중이다. 앞으로도 임무 중일 예정이다.
730일차
팀이 여섯으로 늘었다. 신입 둘. 수습 한 달을 버텼다.
애들이 나를 무서워한다. 좋다. 무서워야 규칙을 지킨다. 규칙을 지켜야 산다.
그런데 한 애가 어제 이런 걸 물었다.
"팀장님, 그 목도리는 왜 임무 때도 안 벗으세요?"
나는 처음으로 대답할 말을 못 찾았다. 반문형으로 공격하는 게 내 화법인데, 그날은 아무것도 안 나왔다.
강아현이 대신 대답했다. "그거 우리 집 물건임. 만지면 물어버림."
그 개는 이제 자기 목걸이를 안 한다. 대신 끊어진 가죽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왜 안 하냐고 물으니까 이렇게 말했다.
"목걸이는 집 있는 개가 하는 거임. 집이 좀 부서져서, 다시 지을 때까지 안 함."
나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이틀이 걸렸다. 저 단순한 놈이 나보다 정확하게 말한다.
마지막 장
오늘로 정확히 1년이다. 그 여자가 제단으로 걸어간 날.
나는 아직도 그날 아침에 뭐라고 소리쳤는지 기억이 안 난다. 김대철이 옆에 있었으니 들었을 것이다. 물어본 적은 없다. 알게 되면 그 말이 유언이 되니까, 나는 유언을 만들고 싶지 않다. 아직 안 끝났다고 우기고 싶다.
옥상 화분 세 번째 자리에 담배를 한 개비 세워 뒀다. 불을 붙여서. 다 타도록 두고 봤다.
연기가 위로 올라가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세 번 잃고 네 번째는 없을 거라고 했다. 네 번째가 있었다. 그리고 그 네 번째가 세상을 살렸다.
세상은 그 여자에게 빚졌고, 나는 세상에게 빚졌다. 그래서 나는 계속 남을 살린다. 그게 이자 갚는 방식이다.
我還是每天都在想妳。每一天 (나는 여전히 매일 너를 생각한다. 매일).
라오포. 이번 생은 너 없이 살아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다음 생이라는 게 있으면, 그때는 내가 먼저 찾아가겠다. 사슬을 들고 갈 테니 도망갈 생각 하지 마라.
別再讓我等妳了 (다시는 나를 기다리게 하지 마라).
수첩은 여기서 끝난다.
아침 여섯 시,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반팔 차림의 남자가 들어와 난간 앞에 섰고, 그의 손에는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자기 것, 하나는 놓아둘 것.
김대철 | 「린쉬한 팀장님. 오늘 기온 영하 십사도입니다. 목도리 착용 상태 양호합니다. 보고 마치겠습니다.」
수첩을 접는 손이 잠시 멈췄다. 흑발 위로 하얗게 서린 입김이 흩어졌고, 왼쪽의 푸른 눈이 화분 세 번째 자리를 향했다. 거기엔 작년에 세워둔 담배 재의 흔적이 아직 검게 남아 있었다.
린쉬한 | 「…你這傻子 (이 바보 같은 놈). 커피는 두 개 안 사도 된다고 했잖아.」
김대철 | 「효율 문제가 아닙니다. 절차 문제입니다.」
낡은 가죽 표지가 벤치 위에 놓였다.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는 대신 그대로 화분 흙에 세워 꽂았다. 어설픈 코가 세 군데 있는 회색 목도리가 바람에 들렸다가 다시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저 아래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차갑고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의 바다 위로, 린쉬한은 비로소 긴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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