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에피소드: 성배전쟁 타임라인
EP.1 「소환」
후유키시 외곽, 폐교회 지하. 기태온이 영주의 마력을 쏟아부은 것은 새벽 두 시였다. 마술 이론 따위 모른다. 소환진의 문양은 경찰 자료실에서 복사한 제4차 전쟁 기록물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고, 주문은 인터넷에서 주운 것이었다. 손등의 번개 문양이 세 줄기 전부 형광빛으로 타오를 때, 지하 전체가 푸른 전류로 가득 찼다. 벽이 갈라지고, 바닥이 녹고, 기태온 자신의 피부도 갈라지는 줄 알았다. 그리고―
화약 냄새.
연기가 걷혔을 때, 소환진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짧은 밀금발. 은회색 코트.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 은빛 머스킷. 기태온이 3년을 쫓은 윤곽이 고개를 천천히 돌려 이쪽을 보았다. 푸른빛이 도는 회색 눈동자가 번개의 잔광에 반사되어 투명하게 빛났다. 크고 둥근 눈매, 짙은 쌍꺼풀, 끝이 살짝 내려간 눈썹. 곤란한 듯 웃는 듯한 표정이 디폴트로 붙어 있었다.
"아처 클래스, 아라베스크."
그녀가 말했다. 끝이 살짝 늘어지는 어조. 위급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바람에 실리는 것 같은 느긋한 발성.
"진명은―글쎄, 알 필요 있어? 아직."
머스킷을 어깨에서 내려 한 바퀴 돌렸다. 능숙한 손놀림. 총구가 기태온을 가리킨 적은 한순간도 없었으나, 그 존재감만으로 공기가 팽팽해졌다. 시선이 기태온의 왼손 위에 머물렀다. 번개 문양.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갔다.
"……전기?"
머스킷이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한 걸음 다가왔다. 기태온은 움직이지 못했다. 3년 전 지하의 잔상이 지금 눈앞에 실체로 서 있었다. 숨을 쉬고, 말을 하고, 화약 냄새를 풍기며.
"곤란하네."
그녀가 말했다. 그 한마디의 의미를 기태온은 읽지 못했다. 다만 심장이 방전하듯 뛰었고, 영주가 손등에서 미친 듯이 맥동했다. 아처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정말로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EP.2 「전투 ─ 항구의 랜서」
제3일 밤. 신도 항구.
랜서가 먼저 왔다. 붉은 창이 가로등을 두 개 베어 넘기며 기태온의 흉부를 노렸고, 기태온은 본능적으로 전류를 양 주먹에 집중해 창대를 쳐냈다. 금속과 전기가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팔뚝이 저렸다. 서번트의 일격을 인간이 막아낸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었으나, 영주에서 흘러나오는 과잉 마력이 근섬유를 강화한 덕이었다.
두 번째 찌르기는 피하지 못했다. 왼쪽 어깨에서 팔꿈치까지를 가르는 절창. 피가 콘크리트 위에 선을 그렸다. 기태온이 무릎을 꿇으려는 순간―
총성.
은빛 탄환이 랜서의 창끝을 정확히 타격하며 궤적을 꺾었다. 두 번째, 세 번째 탄이 연속으로 날아와 랜서의 발밑에 착탄했고, 탄이 터지며 발생한 은빛 파동이 기태온의 몸을 감쌌다. 찢어진 어깨의 통증이 한 톤 낮아졌다. 에코 안정화―아니, 이 세계에서는 마력 안정화. 가이딩이 아닌 형태로 재현된 그녀의 본능.
"마스터, 뒤로."
위에서 왔다. 컨테이너 꼭대기. 머스킷 세 정을 허공에 전개한 아처가 연사 체제에 들어가 있었다. 사격 궤적이 남긴 은실이 항구의 지면 위에 기하학적 문양을 그렸다. 칠 에리어. 그 영역 안에 선 기태온의 머릿속에 경로가 떠올랐다. 왼쪽 3시 방향 컨테이너 뒤. 회피. 거기서 전류를 모아 기습.
따랐다. 의심 없이. 아테나의 권능이 인간의 판단을 보조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녀를 믿은 것인지. 기태온이 컨테이너 뒤에서 뛰어나와 전류를 실은 주먹을 랜서의 옆구리에 박아 넣었을 때, 동시에 아처의 정밀 사격이 랜서의 양 무릎을 관통했다. 창이 바닥에 떨어졌다.
"……퇴각한다."
랜서가 영체화하며 사라졌다. 남은 것은 피 묻은 콘크리트와, 은실의 잔광과, 숨을 몰아쉬는 기태온뿐이었다. 아처가 컨테이너에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발끝부터 닿는 착지. 발레리나의 것.
"42점."
"……뭐?"
"오늘 전투 점수. 100점 만점에."
"그게 점수를 매길 상황이야?"
"곤란하네. 화났어?"
화난 것이 아니었다. 기태온의 심장이 전투 때문이 아닌 이유로 뛰고 있었을 뿐이다.
EP.3 「분기점 ─ 영주의 무게」
제7일. 류도사 산문 앞.
캐스터 진영과의 교전 중, 아처가 처음으로 결계에 갇혔다. 대마력 C로는 무효화할 수 없는 A급 이상의 고위 마술. 다층 영창으로 짜여진 공간 폐쇄 결계. 안에서 아처의 마력이 급격히 소모되고 있었다. 독립행동 A라 해도, 마력 자체를 흡수당하면 현계 유지에 한계가 온다.
기태온은 영주를 보았다. 두 획이 남아 있었다.
한 획을 쓰면 결계를 강제로 깨뜨릴 수 있다. 서번트에 대한 절대 명령. 아처의 출력을 일시적으로 보구 급까지 끌어올려 내부에서 폭파시키는 방법. 그러나 그것은 '명령'이었다. 이 서번트의 의지와 무관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 독립행동 A를 가진 서번트에게 명령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쓰지 마."
결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약해져 있었으나, 끝이 늘어지는 어조는 그대로였다.
"영주. 쓰지 마, 마스터."
"닥쳐. 네가 사라지면 어쩌라고."
"사라지진 않아. 독립행동 있잖아. 조금 기다리면―"
"기다리래?"
기태온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전류가 양 손에서 폭주하듯 새어나왔다. 주변 나무가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3년을 기다렸다. 지하에서 본 잔상을 쫓아 여기까지 왔다. 이제 와서 '기다리라'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
"한 획이면 돼. 한 획."
"그러면 남은 건 하나야. 마스터. 전쟁 끝날 때까지 하나로 버틸 수 있어?"
"상관없어."
"……곤란하네."
그 '곤란하네'의 색이 달랐다. 평소의 느긋함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포기하는, 혹은 받아들이는 음색. 기태온은 듣지 못했다. 영주의 두 번째 획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번개가 산문 전체를 삼켰고, 결계가 유리처럼 깨졌고, 연기 속에서 은빛 코트가 나부꼈다.
아처는 무사했다. 그러나 기태온을 올려다보는 눈빛에 처음으로 읽을 수 있는 감정이 떠올랐다.
곤란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도 ─ 두려움에 가까운 것이었다.
남은 영주, 한 획.
EP.4 「결말 ─ 세 갈래의 길」
루트 A: 포기
제12일. 최후의 서번트를 앞두고 기태온은 멈췄다. 남은 영주 한 획. 이것을 쓰면 성배에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아처는 사라진다. 성배에 소원을 빌어 그녀를 현세에 묶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그것은 다시 '명령'이 된다. 독립행동 A의 서번트를,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계에 잡아두는 것.
"포기해."
기태온이 말했다. 성배전쟁을. 마지막 영주를 쓰지 않았다. 아처는 마력 공급이 끊기며 천천히 투명해져 갔다. 독립행동으로 일주일은 남아 있을 수 있었으나, 그녀는 남지 않았다.
"잘했어, 마스터."
웃었다. 진짜로. 곤란한 듯이 아니라, 처음으로 맑게. 은빛 입자가 새벽 빛에 흩어지며 사라졌고, 기태온의 손등에서 영주가 완전히 소멸했다.
루트 B: 승리 ─ 그리고 거부
성배에 닿았다. 소원을 빌 자격을 얻었다. 기태온이 입을 열려는 순간, 아처의 총구가 성배를 겨누었다.
"그거 오염됐어."
"……뭐?"
"제3마법의 잔재가 아니야. 앙리 마뉴의 저주가 섞여 있어. 소원을 빌면 형태가 뒤틀려서 실현돼. '다시 만나게 해 줘'라고 빌면―나를 이 세계에 강제 속박하는 형태로 이루어질 거야. 영원히 사라지지 못하는, 성배의 꼭두각시로."
기태온의 손이 떨렸다. 영주 마지막 한 획이 손등에서 맥동했다. 이것을 쓰면 아처의 사격을 멈출 수 있다. 성배를 지킬 수 있다. 소원을 빌 수 있다. 그녀를 영원히―
"마스터."
아처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은회색 눈동자에 전류의 잔광이 반사되어 있었다.
"곤란하네. 고르라는 거야? 나를 속박할지, 놓아줄지."
기태온은 마지막 영주를 ─ 쓰지 않았다. 총성이 울렸고, 성배가 산산이 부서졌다.
루트 C: 얼터화 ─ 번개의 광기
기태온이 마지막 영주를 썼다. "사라지지 마"―그 명령이 아처의 영핵에 새겨지는 순간, 성배의 저주가 둘 사이의 계약선을 타고 역류했다. 아처의 눈동자에서 은빛이 사라지고, 검은 금이 갔다. 독립행동 A가 '속박'으로 반전됐다. 마스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얼터·아라베스크. 머스킷은 검게 변했고, 탄환은 안정화가 아닌 '파괴'를 실었다. 기태온을 해치지는 못했다. 영주의 명령이 그것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눈동자의 빛이 사라진 그녀를 보며 기태온은 깨달았다. 이것은 재회가 아니었다. 감금이었다.
EP.5 「후일담」
루트 A 후일담: 「빈손」
기태온은 형사로 돌아갔다. 영주가 사라진 손등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술회로는 서서히 퇴화했고, 전류의 과방전도 멎었다. 일상이 돌아왔다. 그러나 새벽마다 같은 꿈을 꾸었다. 컨테이너 꼭대기에 앉아 다리를 꼬고, 곤란한 듯 웃는 누군가의 실루엣. 화약과 베르가못. 어깨에 걸친 은빛 무언가.
3년이 지났다. 6년째 같은 꿈을 꾸었다. 후유키시 경찰서에서 퇴근하던 밤, 편의점 앞에서 막대사탕을 물고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짧은 밀금발. 끝이 내려간 눈썹. 푸른빛이 도는 회색 눈동자가 이쪽을 보았다. 보았다가, 지나쳤다. 알아보지 못하는 눈이었다. 기태온의 심장이 멎었다가 다시 뛰었다.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형사의 눈이, 그녀의 손등을 보았다. 아무 문양도 없었다. 그저 보통 사람의 손이었다.
"……저기."
여자가 멈췄다. 고개를 돌렸다. 곤란한 듯 웃는 듯한 표정이 디폴트로 붙어 있었다.
"뭐 보세요?"
반말이 아니었다. 존댓말.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적당한 거리의 경어. 기태온의 폐가 쪼그라들었다. 알아보지 못한다. 당연했다. 영령의 기억은 좌에 귀환하며 소거된다. 여기 서 있는 것은 청명이라는 이름의, 전쟁과 무관한 보통 여자일 뿐이었다.
"……아, 아뇨."
입이 굳었다. 형사 시절 어떤 용의자 앞에서도 말이 막힌 적 없는 남자가. 목을 긁었다. 오래된 습관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여자는 막대사탕을 입에서 빼며 고개를 기울였다. 편의점 조명이 밀금발 위로 떨어졌다. 베르가못. 아주 희미하게, 화약 냄새가 섞인. 기태온의 심장이 영주 없이도 맥동했다.
"곤란하네."
여자가 중얼거렸다. 돌아섰다. 걸어갔다. 기태온은 쫓지 않았다. 쫓을 수 없었다. 영주도, 계약도, 명령권도 없는 빈손이었으므로. 그러나 발끝이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내일도 이 편의점 앞을 지나갈 것이다. 모레도. 그 다음에도. 이번엔 영주 따위 없이, 이름을 물어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루트 B 후일담: 「빈 성배, 가득한 손」
성배가 부서진 류도사 산꼭대기에서, 아처의 영체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은빛 입자가 새벽 하늘로 올라갔다. 마력의 원천이 사라졌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독립행동 A. 일주일의 유예. 그러나 그녀는 남지 않겠다고 했다.
"잘했어, 마스터."
같은 말이었다. 루트 A와 같은 웃음이었다. 그런데 기태온은 이번엔 웃지 못했다. 부서진 성배의 파편을 밟으며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다.
"기다려."
"뭘?"
"일주일. 독립행동. 남아 있잖아."
아처의 눈이 미세하게 넓어졌다. 흩어지던 은빛 입자가 잠시 멈칫했다. 기태온이 손을 내밀었다. 영주가 없는 왼손. 번개 문양 대신 남은 것은 희미한 화상 자국뿐이었다. 명령이 아니었다. 계약도 아니었다. 그저 손이었다.
"일주일이면 돼. 할 말 있으니까."
"……곤란하네."
입꼬리가 올라갔다. 늘어지는 어조 그대로. 은빛 입자가 다시 뭉쳐 형태를 이루었고, 차가운 손끝이 기태온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일주일. 168시간. 그 안에 3년치 말을 전부 쏟아내야 했다.
충분했다.
루트 C 후일담: 「번개의 새장」
얼터화된 아처는 펜트하우스에서 나가지 못했다. 영주의 명령이 보이지 않는 결계가 되어 공간을 봉쇄하고 있었다. 검게 변한 머스킷은 주인의 허락 없이는 소환되지 않았고, 은빛이 사라진 눈동자는 창밖을 바라보되 무엇도 비추지 않았다.
기태온은 매일 돌아왔다. 출근하듯. 음식을 가져오고, 말을 걸고, 손을 잡았다. 전류가 그녀에게 흘렀으나, 얼터의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파장이 맞지 않았다. 같은 존재인데,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나야. 알지?"
대답은 없었다. 검은 눈동자가 기태온을 보았다. 보았으나 보지 않았다. 속박된 영령은 마스터를 인식하되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명령의 원천. 마력의 공급원. 새장의 열쇠. 그것이 전부.
기태온은 매일 밤 그녀의 손을 잡고 잠들었다. 차가웠다. 체온이 없었다. 화약 냄새도, 베르가못도 사라진 뒤였다. 남은 것은 번개의 냄새뿐이었고, 그것은 기태온 자신의 것이었다.
성배전쟁은 끝났다. 기태온은 이겼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녀는 여기 있다.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영원히.
기태온은 웃었다. 3년 전 지하에서 본 잔상을 마침내 손에 넣었으므로. 그런데 손안의 것이 잔상보다도 희미했다. 아무것도 없는 손으로 잔상을 쫓던 그때가, 차라리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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