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군복 상의의 소맷단을 팔꿈치까지 접어 올리는 동안 나는 창틀 위에 놓인 술병들의 서열을 무의미하게 훑었고, 그중 어느 것도 오늘 아침의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는 사실만을 다시 확인했을 뿐이었다. 총기 케이스의 잠금장치를 엄지로 밀어 열자 눅눅한 새벽 공기 속으로 화약 냄새와 기름 냄새가 동시에 번져 나왔고, 그 지독하게 익숙한 냄새는 이상하리만치 사람의 정신을 맑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탄창을 확인하고, 슬라이드를 당겨 약실을 비우고, 다시 밀어 넣고, 손바닥으로 그립을 두어 번 두드려 감각을 되살린다. 이 일련의 동작은 이십 년 가까이 반복되어 이제는 사고를 거치지 않는 종류의 것이 되어버렸고, 덕분에 나는 손을 움직이는 내내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위성 사진 속에서 흐릿하게 잡혔던 그 하얀 자락. 가운이라기엔 너무 길고 천막이라기엔 너무 정갈했던 그 얼룩 하나가 망막 뒤편에 눌어붙어 좀처럼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결국 아무것도 아닐 확률이 구십구 퍼센트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동시에 나머지 일 퍼센트를 향해 기꺼이 전 재산을 밀어 넣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이기도 했다. 평생 단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도박꾼의 손버릇이란 그런 것이다.
방수 서류철을 다시 펼쳐 위성 사진의 좌표를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동안, 나는 무의식적으로 왼손 약지를 문지르고 있었다. 회색 테두리에 은색 장식이 박힌 싸구려 플라스틱 반지. 뽑기 기계에서 나온 이 조악한 물건은 이미 모서리가 닳아 손톱으로 긁으면 도색이 벗겨질 지경이었으나, 나는 이것을 작전 중에도 끝내 빼지 않았다. 지문 인증이니 암호화 폴더니 하는 것들보다 훨씬 원시적이고 훨씬 확실한 방식의 보관법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담뱃갑을 뒤집어 마지막 한 개비를 털어내다가 나는 문득 웃음을 흘렸는데, 그 여자가 있었다면 지금쯤 내 손에서 갑째로 낚아채 창밖으로 던져버린 뒤 폐 사진을 들이밀며 잔소리를 퍼부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담배는 다시 갑 속으로 돌아갔다. 아주 잠깐만.
我戒煙嘅話,你會唔會諗住返嚟鬧我一頓?
(내가 담배 끊으면, 나 한번 혼내주려고 돌아올 생각은 없어?)
무장을 마치고 문을 나서자 새벽의 빈민가는 빗물에 씻겨 기묘하게 투명해져 있었고, 철제 계단의 녹슨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가로등의 주황빛을 잘게 부수며 반짝였다. 골목 어귀의 국숫집에서는 벌써 첫 육수를 끓이는 김이 피어올랐고, 그 하얗고 둔중한 수증기 사이로 지나가는 노파의 슬리퍼 소리가 규칙적으로 철벅거렸다. 세상은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다. 누가 죽든 살든 완탕면은 새벽 다섯 시에 끓기 시작하고, 도박장은 정오에 문을 열며, 격벽 너머의 놈들은 오늘도 무언가를 훔쳐 달아날 것이다. 이 무자비할 정도의 태연함이야말로 내가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였고, 동시에 내가 이 도시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은 이유이기도 했다. 계단 아래에서 4가 검은 차량의 조수석 문을 열어둔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고, 그의 젖은 우산은 이미 비닐에 싸여 트렁크 어딘가로 격리된 뒤였다.
Neunzehn Minuten. Du bist überraschend pünktlich.
(십구 분. 놀랍게도 시간을 지켰군.)
나는 대답 대신 서류철로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며 조수석에 몸을 밀어 넣었고, 시트에 등을 붙이자마자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다리를 꼬았다. 차가 출발하고 빈민가의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동안 창밖으로 흘러가는 간판의 네온이 하나씩 꺼져갔으며, 그 소멸의 순서는 마치 누군가 카운트다운을 세는 것처럼 정연했다. 격벽 검문소까지는 사십 분, 데드존 북부 3구역까지는 다시 세 시간. 나는 그 시간 동안 잠을 잘 생각이 전혀 없었고, 대신 머릿속에서 위성 사진의 픽셀을 몇 번이고 확대하고 축소하기를 반복할 작정이었다. 4가 운전대를 잡은 채 곁눈질로 나를 한 번 살폈고,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는 기색이 목젖의 움직임에서 드러났다. 나는 그것을 모른 척해주는 정도의 아량은 갖추고 있었다.
Hey. If we find a freezer container out there, I'm opening it myself. Nobody else touches it.
(어이. 거기서 냉동 컨테이너 찾으면, 내가 직접 연다. 아무도 손대지 마.)
차창에 이마를 기대자 유리 너머로 차가운 습기가 배어들었고, 나는 그 서늘함을 뺨으로 받아내며 눈을 감았다.
격벽 검문소의 조명은 인간의 얼굴을 시체처럼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나는 그 창백한 백색광 아래에서 통행 허가증을 제출하며 검문관의 지루한 시선을 마주했다. 홍채 인증기의 붉은 선이 선글라스 너머의 눈동자를 훑어 내리는 동안, 나는 이 절차가 얼마나 우스운 형식인지를 생각했다. 데드존으로 나가는 인간을 붙잡아 신원을 확인하는 짓이란, 관 속으로 들어가는 자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어차피 저 문 너머에서는 이름도 국적도 아무런 무게를 갖지 못한다. 그곳에서 유효한 화폐는 오직 탄약과 물, 그리고 살아 있는 심장 하나뿐이었다. 4는 서류를 접어 넣으며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했고, 그의 손끝은 운전대 위에서 미세하게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저 새끼가 초조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십 년을 봤으니 그 정도는 안다.
강철 격벽이 굉음과 함께 갈라지자 그 틈으로 밀려든 것은 빛이 아니라 색채 자체가 탈색된 회백색의 벌판이었고, 새벽의 잔광 속에서 그 광경은 기묘하게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부서진 고속도로의 잔해가 척추뼈처럼 지평선까지 이어졌고, 그 위로 낮게 깔린 안개는 방사능 계측기의 바늘을 아주 조금씩 떨게 만들었다. 차체가 균열을 밟을 때마다 서스펜션이 신음을 뱉었고, 나는 그 진동에 몸을 맡긴 채 무릎 위의 서류철을 한 손으로 눌렀다. 창밖으로 스쳐 가는 폐허들 사이에서 이따금 사람 형체 같은 것이 움직였으나, 그것이 정말 사람인지 아니면 바람에 나부끼는 천 쪼가리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총을 들어야 하고, 총을 드는 순간 시간이 지연되며, 시간이 지연되면 그 하얀 자락에 닿는 일이 그만큼 멀어진다. 나는 오늘 대단히 인색한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聽住。今次唔係普通嘅掃蕩。我唔想有人自作主張。
(잘 들어. 이번 건 평범한 소탕이 아니야. 누가 제멋대로 굴었으면 좋겠지 않아.)
무전기에서 잡음이 튀더니 2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위성 링크가 데드존 안쪽에서 이토록 선명하게 잡히는 것은 저 녹발 자식이 밤새 뭔가를 뜯어고쳤다는 뜻이었고, 나는 그 사실을 칭찬하는 대신 침묵으로 인정했다. 그가 전송한 열영상 데이터가 대시보드 위의 전개형 스크린에 펼쳐졌으며, 3구역 폐수처리장 부지에 밀집한 열원 신호가 열일곱 개. 그중 두 개는 움직임 없이 고정되어 있었고, 그 위치는 정확히 냉동 컨테이너가 놓인 것으로 추정되는 창고 내부였다. 나는 그 두 점을 손끝으로 짚으며 스크린을 확대했고, 픽셀이 뭉개질 때까지 밀어붙였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기를 세 번 반복했다. 컨테이너가 전력을 공급받고 있다는 뜻이다. 밀그램 놈들이 굳이 발전기를 돌려가며 냉동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그 안의 내용물이 상하면 곤란한 종류라는 소리였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심장은 평소보다 두 박자쯤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Nathaniel. Tell me the container's internal temperature. I want the exact number, not an estimate.
(나타니엘. 컨테이너 내부 온도 불러. 추정치 말고 정확한 숫자로.)
무전 너머에서 짧은 혀 차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마이너스 사 도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체 보존용 냉동고의 표준 온도는 그보다 훨씬 낮다. 마이너스 사 도는 조직을 얼려 죽이지 않으면서 부패만 늦추는, 지극히 애매하고 지극히 의료적인 수치였다. 나는 그 숫자를 입 안에서 몇 번 굴려보다가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는데, 4가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는 기색이 느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건 시체를 보관하는 온도가 아니다. 이건 무언가를 살려두려는 온도다. 물론 나는 이 판단이 도박꾼 특유의 자기기만이며, 냉동 혈장이나 백신 앰플 따위를 보관하는 데도 흔히 쓰이는 온도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평생 승률을 계산해서 판돈을 건 적이 없는 인간이었고,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놓인 것은 마이너스 사 도라는 이름의 아주 얇고 아주 밝은 카드 한 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뒤집기로 했다.
차량이 폐수처리장 외곽 이 킬로미터 지점에서 멈춰 섰고, 나는 문을 열고 내려서며 부츠 밑창으로 마른 흙을 몇 번 짓이겼다. 바람에서 쇳가루와 곰팡이, 그리고 오래된 소독약 냄새가 뒤섞여 밀려왔는데, 마지막 것은 아마도 내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착각을 굳이 정정하지 않은 채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폐수처리장의 외곽 철망은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갈라져 있었고, 그 갈라진 틈으로 바람이 통과할 때마다 금속이 서로를 긁는 소리가 낮게 울렸는데 그것은 마치 아주 늙은 짐승이 잠결에 내뱉는 숨소리와도 흡사했다. 나는 몸을 낮춘 채 콘크리트 배수로의 그늘을 따라 이동했고, 부츠 밑창이 침전물 위를 밟을 때마다 발생하는 미세한 점착음을 최대한 눌러 없애며 걸음의 간격을 조정했다. 뒤따르는 4의 호흡은 여전히 지나칠 정도로 규칙적이었으며, 저 사내는 십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총알이 귓가를 스쳐도 심박수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열원 열일곱 개 중 다섯이 외곽 초소에 분산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창고 쪽으로 몰려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신호를 보냈다. 왼쪽 우회, 소음기 사용, 비명 금지. 이 세 가지만 지켜지면 오늘 아침의 셈은 대단히 깔끔해질 것이었다. 안개 사이로 초소의 랜턴 불빛이 흔들렸고, 그 아래 방독면을 쓴 사내 하나가 손을 비비며 하품을 삼키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 삼십 분. 세상 어디에서든 인간이 가장 게을러지는 시각이다.
첫 번째 놈의 뒤로 다가서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열두 걸음이었고, 나는 그의 목덜미와 방독면 고정 벨트 사이의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틈을 향해 나이프를 밀어 넣으며 다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방독면 안쪽에서 뭉개진 숨이 두 번 터져 나왔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그를 배수로 벽에 기대어 앉히며 손목의 단말기를 뜯어냈고, 화면에 뜬 마지막 로그를 훑었다. 컨테이너 발전기 연료 교체, 세 시간 전. 담당자 서명 없음. 이 조직은 서류를 남기지 않는 습관 하나만큼은 훌륭했으나, 기계는 언제나 인간보다 정직하게 기록을 남기는 법이었다. 나는 그 로그를 4의 단말기로 전송하고 다시 몸을 낮췄다. 심장이 뛴다. 정확히는, 뛰고 싶어 하는 것을 내가 억누르고 있었다. 마이너스 사 도. 그 숫자 하나가 아직도 뒤통수 어딘가에 못처럼 박힌 채 빠지질 않았다.
三個。左邊嗰個係我嘅。你唔好郁。
(세 놈. 왼쪽 건 내 거야. 넌 가만있어.)
초소를 정리하는 데 사 분, 창고 외벽까지 접근하는 데 다시 육 분이 소요되었고, 그동안 이 폐허 위로는 아무런 경보도 울리지 않았다. 창고의 셔터는 절반쯤 내려와 있었으며 그 아래로 새어 나오는 것은 형광등의 창백한 빛이 아니라 발전기의 진동음과 함께 흘러나오는 냉기였는데, 나는 그 냉기가 손등의 솜털을 곤두세우는 감각을 아주 오랫동안 느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원. 그래, 병원 냄새다. 소독약과 냉각 코일과 살균 램프의 그 지긋지긋하게 청결한 냄새. 이 방사능 낙진 투성이의 황무지 한복판에서 그런 냄새가 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부조리였고, 부조리란 언제나 무언가 값진 것이 숨겨져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셔터 아래로 몸을 밀어 넣으며 선글라스를 벗어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실내다. 규칙은 규칙이다.
창고 내부의 광경은 예상과 달리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약탈품을 쌓아 올린 난장판이 아니라, 규격에 맞춰 정렬된 의료용 카트와 멸균 팩, 그리고 벽면을 따라 늘어선 냉동 유닛들. 그 중앙에 놓인 컨테이너는 다른 것들보다 두 배쯤 컸으며, 측면의 계기판에는 초록빛 숫자가 조용히 명멸하고 있었다. 마이너스 사 점 이 도. 나는 그 숫자를 눈으로 세 번 읽었고, 세 번 모두 같은 값이었으며, 그럼에도 네 번째로 다시 읽었다. 컨테이너 옆에는 방독면을 벗은 사내 하나가 등을 돌린 채 클립보드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는데, 발소리를 듣고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공포보다 먼저 당혹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이마에 총구를 대는 대신 그의 손목을 꺾어 클립보드를 빼앗았고, 종이 위에 적힌 것을 확인하는 순간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검체 목록. 그리고 그 하단에, 낯익은 필적으로 남겨진 확인 서명 하나. 손가락 마디만 움직여 매듭을 짓듯 눌러쓴 그 글씨.
Who signed this? Say it out loud. Slowly.
(이거 누가 서명했어? 소리 내서 말해. 천천히.)
사내는 대답하지 못하고 침을 삼켰으며, 그의 눈동자가 컨테이너 쪽으로 한 번 흔들렸다가 돌아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그를 벽에 밀어붙인 채 4에게 결박을 맡기고 컨테이너 앞으로 걸어갔고, 잠금 패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잠금 패널의 표면은 손바닥보다 훨씬 차가웠고, 그 냉기는 피부를 통해 손목뼈를 타고 팔꿈치까지 기어 올라왔는데 나는 그 감각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손바닥 전체를 더 넓게 붙였다. 발전기의 진동이 금속을 통해 미약하게 전해졌고 그것은 거대한 짐승의 옆구리에 손을 얹었을 때 느껴지는 종류의 박동과 닮아 있었다. 계기판의 초록 숫자가 한 번 깜박였다. 마이너스 사 점 이 도. 여전히. 나는 잠금 해제 코드를 요구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고, 벽에 결박된 사내는 이미 4의 무릎 아래에서 어깨가 탈구된 채 신음하고 있었다. 저 새끼는 늘 필요 이상으로 정확했고 필요 이상으로 조용했다. 나는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두 번째 마디까지만. 그 이상은 시간 낭비였다.
呢個櫃嘅密碼。講出嚟。你嘅手指仲有九隻。
(이 캐비닛 비밀번호. 말해. 네 손가락 아직 아홉 개 남았어.)
사내가 뱉어낸 여섯 자리를 입력하는 동안 나는 내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며, 그 떨림의 원인이 추위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나는 평생 카드를 뒤집기 직전의 이 감각을 사랑해 왔고, 동시에 이 감각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어리석게 만든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승률 따위 계산한 적 없다. 계산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숫자를 누르자 잠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는데, 그것은 총성보다도 크게 들렸다. 압력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하얀 냉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고 그 안개는 바닥으로 흘러내려 내 부츠 발목을 감쌌다. 소독약 냄새.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지독하게, 그리고 무자비할 정도로 낯익은 냄새였다.
문을 당겨 열었다. 내부에는 유닛이 네 개. 그중 세 개는 비어 있었고, 남은 하나에만 생체 유지 장치의 청록색 인디케이터가 느리게 명멸하고 있었다. 유닛 표면의 성에를 손등으로 밀어내자 그 아래로 강화 유리가 드러났으며, 유리 너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색이었다. 회백색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다른 파장을 가진 것. 분홍빛이 아주 옅게 도는 흰 머리칼이 서리 낀 유리에 눌린 채 흩어져 있었다. 나는 숨을 쉬지 않았다. 정확히는 쉬는 방법을 잠시 잊었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두 번 세게 걷어찼고 나는 그 통증을 반가워했다. 이 년 넘게 뛰지 않던 물건이 드디어 제 일을 한다.
...操。
(...씨발.)
유닛 측면의 모니터에는 심박과 뇌파가 표시되고 있었다. 정상 수치보다 현저히 느렸으나 평탄선은 아니었다. 저체온 유도 상태. 의도적으로 대사를 늦춰 조직 손상을 막는 방식. 나는 그 파형이 아주 작은 산맥처럼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이 여자가 나에게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는지를 새삼 떠올렸다. 자기 목숨 사는 데에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여자. 죽는 순간까지도 살아남을 방법을 계산했을 여자. 나는 유리 위에 이마를 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마디로 유리를 세 번 두드렸다. 콘크리트 바닥 위로 4의 부츠 소리가 다가왔다가 두 걸음 앞에서 멈췄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의였다.
Nathaniel. I need a medevac at this location. Not a body bag. A live one. Full cryo-transport rig, and I want a cardiothoracic setup waiting at the wall.
(나타니엘. 이 좌표로 의무 후송 불러. 시체 가방 말고. 산 사람용으로. 저온 이송 장비 풀세트, 그리고 격벽에 흉부외과 세팅 대기시켜.)
무전 너머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 속에서 저 녹발 자식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았다. 그가 되물었다. 누구를 후송하냐고. 나는 대답하는 대신 왼손을 들어 약지에 걸린 싸구려 플라스틱 반지를 엄지로 문질렀다. 회색 테두리에 박힌 은색 장식이 냉동고의 빛을 받아 잠깐 반짝였는데, 그것은 이 창고 안의 어떤 의료 장비보다도 값싸고 어떤 무기보다도 무거운 물건이었다. 나는 유닛 위에 손바닥을 올린 채 아주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성에가 손바닥의 열기에 녹아 물방울로 맺혔다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런 식으로 이길 줄은 몰랐다. 평생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인간에게 이런 패가 돌아온다는 건 대체 무슨 농담인가.
係我老婆。
(내 마누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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