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C 전문
태평양 남단, 정화 프로토콜이 성공적으로 끝난 몇 안 되는 비무장 복원 해역의 하늘은 지독할 정도로 푸르렀다.
지하 50미터 벙커의 납 격벽과 퀴퀴한 활성탄 냄새 대신 코끝을 찌르는 것은 짭조름한 소금기와 강렬한 햇살에 달아오른 백사장의 열기였다. 2080년의 지구상에서 방사능 검출기가 단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청정 수역에 발을 들이는 것은, 마카오 카지노에서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쥐는 것보다도 희귀한 사치였다.
하지만 그 평화는 채 반나절을 넘기지 못했다.
사건은 완벽하게 비현실적이고, 어이가 없을 만큼 찰나에 벌어졌다.
해변에서 제법 떨어진 얕은 여울목, 에메랄드빛 바닷물 위로 거대한 물보라와 함께 솟구쳐 오른 매끄러운 잿빛 등지느러미 무리가 평화로운 휴양지의 적막을 찢었다. 화학 물질로 오염된 데드존의 흉측한 돌연변이 어류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옛 지구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야생 돌고래 무리였다.
그 유려한 장관에 홀린 여자가 손을 뻗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대한 녀석 하나가 장난기가 동했는지, 수면 아래에서 가속을 붙여 솟구치더니 여자의 몸을 제 매끄럽고 단단한 등짝 위로 번쩍 얹어버린 것이다.
첨벙,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여자의 왜소한 체구는 수면 위로 붕 떴다가 돌고래의 등지느러미 사이에 완벽하게 안착했다.
그리고 녀석들은 기다렸다는 듯, 수평선 너머 푸른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시속 40킬로미터가 넘는 맹렬한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선베드에 누워 얼음이 반쯤 녹은 칵테일을 홀짝이며 유유자적 선글라스를 고쳐 쓰던 사내의 시야에 그 해괴망측한 납치극이 들어온 것은 정확히 0.5초 뒤였다.
7의 입에 물려 있던 얇은 종이 빨대가 툭 떨어졌다.
검은색 선글라스가 콧날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드러난 서늘한 잿빛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어 번 끔뻑였다.
유라시아 전선의 참호 속에서 적의 기갑 부대가 몰려올 때도, 밀그램의 테러리스트가 자폭 스위치를 들이밀 때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역전의 돌격병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벽한 뇌 정지를 겪고 있었다.
7 | "What the... Fuck?!"
(뭐야, 시발…… 저게 뭐야?!)
사내는 용수철처럼 선베드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래사장을 밟은 맨발이 바닷물을 튀겼다.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로 점처럼 멀어져 가는 여자의 흰색 원피스 자락, 그리고 그 여자를 등에 태운 채 기세 좋게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물보라를 뿜어내는 돌고래 새끼의 꼬리지느러미가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심지어 납치당한 당사자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바람에 흩날리는 백금발 머리칼 사이로 시원한 바닷바람과 탁 트인 수평선 풍경을 감상하듯 제법 여유로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내의 관자놀이 부근, 붉게 굳은 화상 흉터가 험악하게 꿈틀거렸다.
7 | "Hey! Are you shitting me?! Where do you think you’re taking her, you overgrown sushi roll?!"
(야! 너 지금 나랑 장난까냐?! 그 여자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건데, 이 존나게 커다란 초밥용 생선 대가리 새끼야?!)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으나 돌아오는 것은 유쾌하게 허공을 가르는 돌고래 떼의 초음파 소리뿐이었다.
7의 머릿속에서 전술 계산 시스템이 비상식적인 방향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5백만 크레딧의 부채로 묶어두고, 지하 50미터 요새에 감금하며, 온갖 위협과 가학적인 정사로 장부 밑바닥까지 옭아매어 놓은 자신의 가장 비싸고 소중한 ‘자산’이었다.
밀그램의 암살자 놈들도 손을 못 대서 쩔쩔매던 그 고결한 영국 귀족 출신 의사를, 고작 기름기 반질반질한 해양 포유류 따위가 무단으로 보쌈해 가고 있었다.
그것도 백주대낮에, 눈앞에서.
7 | "No authorization. Unlawful extraction of a strategic asset. That is a hostile act, you slippery bastards."
(인가받지 않은 무단 반출. 전략 자산에 대한 불법 나포. 저건 명백한 적대 행위다, 이 미끌미끌한 새끼들아.)
사내는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그의 시선이 해변 선착장에 정박해 있던 민간용 수상 레저 부교로 꽂혔다. 그곳에는 관광객용으로 대여해 주는 최신형 트윈 터빈 제트스키 한 대가 엔진을 예열한 채 떠 있었다.
사내는 모래를 박차고 전력 질주했다. 189센티미터의 거구가 백사장을 짓밟으며 튀어 오르는 속도는 전장에서 적진을 향해 돌파할 때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구릿빛 피부의 현지 청년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Sir, you need a wristband to rent the—"
(손님, 대여하시려면 손목 밴드를—)
7 | "Put it on my World's Worst tab, kid. Emergency military pursuit."
(워즈워스 장부에 달아둬라, 꼬맹아. 군사적 긴급 추격 작전이니까.)
사내는 청년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 그대로 뜀틀을 넘듯 제트스키 위로 뛰어올랐다.
키가 꽂혀 있지 않은 시동 패널을 보자마자, 사내는 주머니에서 주워 든 다기능 나이프 끝으로 방수 커버를 거칠게 뜯어냈다. 전선 두 가닥을 손가락으로 거칠게 잡아 뜯어 교차 스파크를 튀기자, 300마력 터보 엔진이 요란한 굉음을 토해내며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스로틀을 끝까지 감아쥐는 사내의 입꼬리가 흉포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부아앙—!
제트스키의 후미에서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치며 해안가를 흠뻑 적셨다.
선착장을 박차고 튀어 나간 제트스키는 파도를 부수며 맹렬한 속도로 수평선을 향해 질주했다.
물보라가 사내의 젖은 흑발과 가슴팍의 흉터 위로 거칠게 들이쳤지만, 선글라스를 고쳐 쓴 7의 시선은 오직 저 멀리 푸른 파도 위를 유유자적 가로지르는 돌고래의 등짝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7 | "Hold on, Chloe! I’m coming to repo my collateral!"
(꽉 잡아, 클로이! 내 담보물 강제 집행하러 간다!)
파도를 탈 때마다 제트스키의 선체가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쾅, 쾅 소리를 내며 수면을 후려쳤다.
충격 흡수 장치도 없는 레저용 기체였으나 사내의 단단한 하체는 미동조차 없이 핸들을 틀어쥐고 있었다.
터빈의 회전수가 한계치를 넘어 붉은 경고등을 깜빡거렸지만, 7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 리미터를 뜯어내 버렸다.
엔진의 포효가 바다를 뒤흔들며 돌고래 떼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갔다.
50미터. 30미터. 10미터.
마침내 돌고래의 꼬리가 뿜어내는 하얀 포말이 제트스키의 전면 유리를 강타하는 거리까지 도달했다.
그제야 사내의 눈에 여자의 얼굴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바람을 맞아 옅은 분홍빛이 도는 흰 머리칼을 자유롭게 흩날리며, 놀라움 반 감탄 반이 뒤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그 얄미운 얼굴.
안경 너머의 보랏빛 감도는 푸른 눈동자는, 이 지옥 같은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사내를 보며 어딘가 재미있다는 듯 은은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표정을 확인한 순간, 사내의 속에서 끓어오르던 일말의 긴장감은 완벽한 헛웃음과 도파민으로 치환되었다.
7 | "Having fun, Doctor?! Nice ride you got there! Does it come with medical insurance?!"
(재미 좋으신가, 박사 선생?! 승차감 아주 끝내주네! 그놈의 자가용은 의료 보험 처리는 된답니까?!)
사내는 제트스키를 돌고래의 진행 방향과 정확히 나란히 맞추며 속도를 유지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지근거리였다.
여자를 등에 업고 헤엄치던 돌고래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7을 째려보더니, 삐익—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닷물을 꼬리로 찰싹 쳐 사내의 얼굴에 물벼락을 선사했다.
푸하, 하고 짠물을 뱉어낸 7이 이를 바득 갈았다.
7 | "Did that fish just splash me?! You little slippery delinquent! You think you can out-turn World's Worst?!"
(저 생선 새끼가 지금 나한테 물을 뿌려?! 저 미끌거리는 날라리 새끼가 진짜! 네가 워즈워스 기동력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사내는 왼손으로 핸들을 꽉 쥐어 제트스키의 뱃머리를 돌고래의 진행로 안쪽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물살을 가로막아 녀석의 직진 코스를 강제로 비틀어버리는 난폭한 차단 기동이었다.
경로가 막히자 당황한 돌고래가 속도를 줄이며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 찰나의 순간을 7은 놓치지 않았다.
7 | "Catch!"
(잡아!)
사내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시속 수십 킬로미터로 달리는 제트스키 위에서 몸을 반쯤 던지듯 숙였다.
사내의 억세고 단단한 오른팔이 여자의 잘록한 허리를 낚아챘다.
거대한 완력이 허리를 감싸 안아 번쩍 들어 올리는 순간, 여자의 몸은 매끄러운 돌고래의 등가죽에서 부드럽게 떨어져 나와 사내의 단단하고 뜨거운 품 안으로 통째로 빨려 들어왔다.
풍덩, 하는 거대한 물보라와 함께 닭 쫓던 개 꼴이 된 돌고래가 억울한 듯 꼬리를 허공에 휘젓다 물속으로 잠겨들었다.
사내는 낚아챈 여자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안정적으로 앉히며 오른팔로 가슴팍을 감싸 안았다.
동시에 왼손으로 핸들을 꺾어 제트스키의 후미를 180도 드리프트시키며 거대한 부채꼴 모양의 하얀 파도를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키잉— 하는 터빈의 감속음과 함께, 요란했던 질주는 잔잔한 수면 위에서 천천히 멈춰 섰다.
사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오직 찰랑거리는 맑은 바닷물 소리와, 두 사람이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만이 붉게 물들어가는 수평선 위로 흩어졌다.
사내는 선글라스를 벗어 제트스키 앞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흠뻑 젖은 흑발 사이로 드러난 연회색 눈동자가, 제 품 안에 안겨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내렸다.
다친 곳은 없었다.
오히려 햇살에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과 바닷물에 젖어 쇄골에 달라붙은 셔츠 자락이, 요새의 무균실에 틀어박혀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화사한 빛을 띠고 있었다.
사내는 턱 끝에 맺힌 바닷물을 거칠게 털어내며,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두툼한 손바닥이 여자의 젖은 허리를 묵직하게 감싸 쥐며 제 단단한 흉통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7 | "Unbelievable. Truly unbelievable. I turn my back for thirty seconds to grab a drink, and my five-million-credit asset gets hijacked by marine wildlife."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네.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음료수 한 잔 가지러 딱 30초 한눈판 사이에 내 5백만 크레딧짜리 자산이 해양 야생동물한테 납치를 당해?)
사내는 고개를 숙여 여자의 귓가에 젖은 숨을 훅 불어넣었다.
타르 냄새 대신 짭짤한 바다 냄새가 섞인 목소리는 낮고 짓궂게 긁혔다.
7 | "And look at you. Not even screaming. You were enjoying the cruise, weren't you, Doctor? What, was his back more comfortable than my couch?"
(그리고 네 표정 좀 봐. 소리 한번 안 지르고. 아주 유람선 크루즈 타듯 즐기고 계셨지, 의사 선생? 뭐야, 저 생선 새끼 등짝이 내 소파보다 더 안락하기라도 했어?)
사내의 손가락이 여자의 젖은 뺨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거칠게 닦아냈다.
그의 입술 끝에는 흉포할 만큼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비록 레저용 제트스키의 엔진은 과열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낚아채 온 여자의 몸에서는 소독약 대신 짠 바다 내음이 진동하고 있었지만, 사내는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붉은 노을을 등진 채 여자의 목덜미를 제 어깨에 파묻듯 끌어안았다.
7 | "Don't even think about running away on a dolphin next time. The salvage fee for pulling you out of the Pacific is going straight onto your personal ledger. Plus interest."
(다음번엔 돌고래 타고 도망칠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라. 태평양 한가운데서 널 건져낸 인양 비용은 네 개인 장부에 고스란히 달아둘 테니까. 이자까지 쳐서 톡톡히 갚아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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