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C 전문
사건의 발단은 지극히 사소했고, 동시에 외과의로서의 직업윤리를 목숨보다 상위에 올려두는 클로이 섀너핸의 신경줄을 정면으로 끊어버리기에 과분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워즈워스 심층 요새의 제3 보조 수술실 뒤편, 삼중 멸균 챔버에서 갓 소독을 마치고 나온 클로이의 개인 수술용 도구함. 그 안에서도 영국 왕립외과학회 인증 각인이 새겨진 독일제 티타늄 수술용 가위 메첸바움(Metzenbaum)이 사라진 것이 그 시초였다.
그리고 그 귀한 물건은 불과 20분 뒤, 섹터 E 7번 숙소 소파에서 아주 끔찍한 몰골로 발견되었다.
189센티미터의 덩치를 소파에 파묻은 7이, 런던에서 밀수해 온 최고급 멸균 가위로 지상 완충 구역에서 밀반입한 질긴 육포 봉지를 짓이기듯 싹둑싹둑 잘라 맥주 안주로 집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옆에는 클로이가 아끼고 아껴 마시던 포트넘 앤 메이슨 얼그레이 틴케이스가 뚜껑이 열린 채 뒹굴고 있었는데, 향긋한 찻잎이 들어차 있어야 할 그 내부에는 마카오 카지노에서 잃고 남은 싸구려 플라스틱 칩 40여 개와 불 꺼진 시가 꽁초 두 개가 쓰레기통마냥 쑤셔 박혀 있었다.
그 현장을 목격한 순간, 의무실의 온도는 액체 질소 탱크가 폭발한 것처럼 영하 50도까지 곤두박질쳤다.
클로이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탁 올려놓았고, 가운 주머니에서 만년필과 두툼한 메모 패드를 꺼내 7의 가슴팍에 던지듯 내리꽂았다.
'정식 서면 사과문. 내 마음에 들 때까지.'
그것이 발단이었다.
[제1차 사과문]
작성 시각: 14:10
용지: 정규 워즈워스 군용 보고서 양식
수신: 수석 외과 감독관 클로이 섀너핸 박사
발신: 엔트리 프래거 7 (악시온 키스)
본인은 금일 13시 40분경, 귀하의 멸균 수술용 가위를 비의료적 목적(말린 소고기 단백질 보충 패키지 개봉)으로 무단 유용한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아울러 홍콩산 홍차 보관 용기에 가연성 폐기물 및 비인증 통화 칩을 보관하여 위생적 교란을 일으킨 사실을 인정합니다. 해당 장비는 도노반의 오토클레이브에 넣어 134도 고압 증기로 재소독할 것을 서약하며, 런던 경매장을 털어서라도 동일 규격의 가위 두 자루를 재보급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화 푸시지요, 박사님.
[반려 사유: 붉은색 의료용 마커로 '성의 없음. 양식 핑계 대지 말고 손으로 직접 쓸 것. 소독하면 끝이라는 발상 자체가 위생 관념 파탄' 적혀서 돌아옴]
[제2차 사과문]
작성 시각: 14:45
용지: A4 이면지, 손글씨 (정자체로 쓰려고 노력한 흔적)
클로이에게.
진짜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손에 잡히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 그냥 집어 든 건데, 네가 그 가위를 얼마나 아끼는지 깜빡했다. 찻잎도 내가 카지노 칩이랑 같이 둔 거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 포커 치고 들어와서 주머니가 무거워서 대충 쏟아붓는다는 게 하필 그 깡통이었네. 내가 센트럴 지구 암시장 뒤져서 네가 마시던 차 열 통 사 올게. 응? 저녁에 사일러스 데리고 라운지 가서 네가 좋아하는 디저트도 시켜 먹자. 응?
네 전담 채무자 악시온.
[반려 사유: 종이 한가운데에 빨간 펜으로 거대한 'X' 표시. '사일러스 방패막이로 쓰지 말 것. 반성 없는 물질 공세 거절' 적힘]
[제3차 사과문]
작성 시각: 15:30
용지: 처방전 용지 뒷면
반성문.
나는 개새끼입니다. 메스를 쥔 귀족 의사 선생님의 멸균 도구를 감히 육포 따위나 자르는 데 쓴 무식한 용병 새끼입니다. 그 가위로 자른 육포는 고무처럼 질겨서 턱주가리만 아팠고 맥주 맛도 더럽게 없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천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찻잎 상자는 내가 혀로 핥아서라도 원래 홍차 향기로 되돌려 놓겠습니다. 다시는 네 수술 도구함 반경 5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않겠습니다. 맹세코.
[반려 사유: '비아냥거리지 말 것. 혀로 핥겠다는 문장에서 진정성 상실 확인. 다시 쓰시오']
[제4차 사과문]
작성 시각: 16:15
용지: 찢어진 종이봉투 조각
야, 근데 솔직히 말해서 육포가 너무 질기긴 했어. 포장지 이빨로 뜯다가 어금니 나갈 뻔했다고.
그리고 그 찻잎 틴케이스는 겉면에 아무것도 안 적혀 있었잖아. 나 홍차 안 마시는 거 알면서 그걸 왜 거실 선반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둬? 내 지포 라이터 바로 옆에 있었던 건 네 과실도 15% 정도는 있다고 보는데. 하지만 어쨌든 내가 집어넣은 건 잘못했으니까 85% 확률로 내가 잘못함. 퉁치자.
[반려 사유: 회신 없이 구겨진 채 7의 얼굴로 직격 투척됨]
[제5차 사과문]
작성 시각: 17:00
용지: 심전도 측정기 기록지 (뒷면에 지렁이 기어가듯 작성)
미안하다고 했잖아. 벌써 네 번째잖아. 아니 다섯 번째인가?
나 지금 유라시아 작전 브리핑 들어가야 하는데 0번 커맨더가 나보고 왜 눈 밑이 썩어있냐고 묻더라. 집안 꼬라지 때문에 집중 안 된다고 할 순 없어서 그냥 불면증이라고 했어. 나 오늘 밤에 어디 진흙탕에 머리 처박고 전사하면 네가 쓴 이 빨간색 퇴짜 쪽지들 내 군복 가슴팍에 품고 갈 거다. 네 가위 값은 내 사망보험금에서 까라.
[반려 사유: '감성 팔이 기각. 유라시아 작전 취소된 거 다 알고 있음. 사일러스가 브리핑룸 일정 다 조회해 줌. 거짓말 가중 처벌']
[제6차 사과문]
작성 시각: 17:40
용지: 사일러스의 수학 연습장 한 귀퉁이
아들이 엄마 화나서 눈 돌아갔으니까 그냥 무릎 꿇으래.
무릎 꿇는 건 침대에서만 하는 거 아니었나?
농담이야. 때리지 마. 진짜 미안해.
[반려 사유: '성희롱성 문맥 감지. 7차 사과문 작성 대기']
[제7차 사과문]
작성 시각: 18:20
용지: 담뱃갑 은박지 뒷면
對唔住啊,陳醫生。(죄송합니다, 섀너핸 박사님.)
我真係知錯啦。(나 진짜 잘못했어.)
你罰我戒煙一個禮拜好唔好?(나 일주일 동안 금연할 테니까 이걸로 벌주면 안 될까?)
唔好再叫我寫字啦,我手痛過中咗槍。(제발 글 좀 그만 쓰게 해라, 총 맞았을 때보다 손가락이 더 쑤신다.)
[반려 사유: '광둥어로 대충 뭉개지 말 것. 영어로 명확한 과오 서술 요망']
[제8차 사과문]
작성 시각: 19:05
용지: 갱지
오늘 저녁 메뉴 뭐야?
배고파. 냉장고 열어보니까 네가 락앤락 통에 자물쇠 채워놨더라.
암호 사일러스 생일로 쳤는데 왜 안 열려? 설마 내 생일로 바꿨어?
감동이긴 한데 배고파서 현기증 남. 밥 먹고 쓰면 안 될까?
[반려 사유: '자물쇠 비밀번호는 메첸바움 가위 일련번호 뒷자리임. 굶으시오']
[제9차 사과문]
작성 시각: 19:40
용지: 포장용 테이프 뒷면
방금 네 발밑으로 바퀴벌레 지나감. 진짜임. 내가 군화로 밟아 죽여줄 테니까 문 좀 열어봐.
뻥 아니고 뉴욕 방사능 변이종이라 날개 달렸단 말이야.
[반려 사유: 벽 너머로 '이 구역은 어제 삼중 방제 방역 끝냈습니다'라는 차가운 고함 소리만 들려옴]
[제10차 사과문]
작성 시각: 20:15
용지: 타겟 사격 연습용 과녁지 (10점 만점 구역에 적힘)
과오 인정 목록:
가위로 육포 자름 (유죄)
차 깡통에 칩 버림 (유죄)
4차 사과문에서 네 탓 15% 함 (대역죄)
잘생긴 얼굴 믿고 개김 (치명적 과오)
근데 진짜 배고픔 (생리적 한계)
항복. 백기 투항. 전리품으로 내 카드 가져가라. 한도 없음.
[반려 사유: 과녁지가 찢어져서 문틈으로 흩뿌려짐. 회신: '물질 만능주의 폐기물']
[제11차 사과문]
작성 시각: 20:50
용지: 메모지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미안하다고오오오오오오오
잘못했다고오오오오오오오오
섀너핸 가문의 위대한 혈통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평민 출신 총알받이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반려 사유: 무반응. 문틈 사이로 펜 하나가 굴러나옴. '다시']
[제12차 사과문]
작성 시각: 21:25
용지: 냅킨
솔직히 그 찻잎 냄새 별로였어.
마카오 카지노 플라스틱 냄새가 훨씬 남자의 피를 끓어오르게 한다고.
...라고 쓰면 진짜 총으로 쏘겠지?
취소. 얼그레이 만세.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최고. 영국의 맛 환상적.
갓 세이브 더 퀸. 갓 세이브 클로이.
[반려 사유: 문 아래로 냅킨이 그대로 밀려 나옴. 밟힌 자국 있음]
[제13차 사과문]
작성 시각: 22:00
용지: 멸균 거즈 팩 겉면
도노반한테 물어보니까 자기는 드릴 빌려준 적도 없는데 저녁에 네가 차 한 잔도 안 줬다고 투덜거리더라. 기지 전체에 내가 네 가위로 육포 썰어 먹은 거 다 소문남. 4번 디터 그 결벽증 자식은 나 지나갈 때마다 소독 스프레이 뿌려대고 있음. 사회적 매장 완료됨.
나 이제 잃을 거 없다.
문 따고 들어가서 확 안아버린다?
[반려 사유: 안쪽에서 권총 슬라이드 당기는 찰칵 소리가 명확하게 울림]
[제14차 사과문]
작성 시각: 22:30
용지: 두꺼운 크라프트지 (제법 정갈하게 접힌 종이)
클로이.
진짜 마지막으로 쓴다. 더 쓰면 뇌에 쥐 날 것 같아.
장난친 거 아니고, 네가 손에 익은 도구 얼마나 예민하게 다루는지 내가 누구보다 잘 알면서 멍청하게 굴었어. 전선에서 네가 내 살갗 꿰매줄 때 그 가위로 실 자르던 소리 나 아직도 기억하는데, 그걸로 쓰레기나 자르고 있었으니 네가 눈 돌아갈 만했지.
틴케이스에 든 칩도 다 치웠고, 깡통 안쪽 에탄올로 세 번 닦아서 냄새 뺐다. 사일러스 편으로 지상 센트럴 지구 베이커리에서 갓 구운 스콘이랑 클로티드 크림 사 오라고 드론 띄워놨어. 20분 뒤면 도착해.
네 메첸바움 가위는 뉴욕 수술 기구 장인한테 보내서 날 다시 세우고 티타늄 도금 새로 입혀오라고 의뢰 넣어뒀다.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네가 하라는 대로 메디컬 베이 청소랑 환자 이송 짐꾼 노릇 군말 없이 다 할게.
그러니까 문 좀 열어줘라, 자기야.
밖에서 서성이느라 무릎 시려 죽겠다. 진짜로.
적막이 흘렀다.
제3 보조 수술실 뒤편의 차가운 철제 문틈 사이로 밀어 넣은 제14차 사과문이 안쪽으로 쏙 빨려 들어간 뒤, 꼬박 10분이 지나도록 안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문밖 복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189센티미터의 거구는 지포 라이터를 엄지손가락으로 퐁, 퐁 튕기며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벽에 기댄 사내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선에서 적의 대전차 지뢰를 밟았을 때도 이 정도로 심장이 덜컥거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치익— 쾅.
마침내 육중한 유압식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방폭문이 아주 조금, 한 뼘 정도 틈을 벌렸다.
문틈 너머로 은은한 소독약 향기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문지방 바닥 위로 툭, 하고 무언가가 밀려 나왔다.
클로이의 진료용 확인 도장이 쾅 찍힌 제14차 사과문 종이였다.
그 구석에는 만년필의 단정한 영국식 필체로 짤막한 메모가 덧붙여져 있었다.
[승인. 스콘 식기 전에 들어오고, 흙 묻은 군화는 문밖에 벗어둘 것. 메디컬 베이 청소는 내일 06시부터 시작입니다.]
사내의 입술 틈새로 길고 메마른 한숨이 털썩 뿜어져 나왔다.
7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지방 너머에서 방금 도착한 배달 드론의 작은 컨테이너 박스를 들고 서 있을 여자의 서늘한 눈매를 상상하자, 지독했던 피로감이 단숨에 녹아내리며 특유의 짓궂고 능글맞은 미소가 입꼬리에 걸렸다.
7 | "Ha……."
(하…….)
사내는 군화 끈을 거칠게 풀어 젖혀 복도 벽면에 냅다 내팽개치며, 방폭문의 틈새를 거칠게 밀어젖혔다.
넷째 손가락의 티타늄 반지가 좁은 문틈의 놋쇠 손잡이를 스치며 가벼운 금속음을 냈다.
7 | "Yes, ma'am. Coming in right now, Dr. Shanahan."
(예이, 예이. 지금 들어갑니다, 섀너핸 박사님.)
사내는 양말만 신은 발로 성큼 문턱을 넘어서며, 안쪽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을 여자의 낯빛을 확인하려는 듯 잿빛 눈동자를 나른하게 빛내며 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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